배수아 오늘의 작가상 수상소감
많은 다른 작가들처럼 나도 작가 이외의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 그건 번역이다. 창작과 번역은 많이 다르면서도 동시에 그만큼 비슷하여, 어떤 경우 창작은 번역이 되고 번역은 곧 창작이 되기도 했다. 두 가지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대략의 규칙이라고 할 만한 습관이 생겼다. 한국의 집에 머물 때는 주로 번역을 하고 외국을 여행하는 동안에는 내 책을 쓴다는 것이다.
며칠 전 어느 매체와 인터뷰를 하는데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의 작품에는 유난히 여행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아마도 직접적인 이유는, 내가 여행 중일 때 주로 작품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 같은 의미이긴 하지만 좀 더 다른 층위에서 말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내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인식하는 여성이면서 번역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눈앞에 많은 경계선을 둔 사람은,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을 많이 알지 못한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많지 않고, 사람을 기억하는 일은 더욱 적다. 얼마 전 취리히 구시가지의 한 오래된 서점에 갔는데, 여든 살은 훨씬 넘어 보이는 서점의 여주인이, 자신은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이름이 아니라 주로 얼굴로 기억한다고 말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 역시 오래전부터 사람을 이름이나 명칭으로 기억하기보다는 그들이 했던 말로 기억하는 편이다. 이름보다 더 매혹적인 말들이 내 기억 속에 있다. 내가 나에게 기억되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내가 한 말에, 혹은 내가 쓴 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말은 이야기일까? 이야기가 없는 말, 혹은 말이 없는 이야기란 어떤 것일까?
며칠 전의 인터뷰에서 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 작품의 줄거리는 매우 불연속적이고 사건이 여러 층위에서 일어나기도 하여 파편적인 콜라주처럼 보인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나는 대답했다.
“나는 ‘이야기’에 매우 양가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느낀다. 어린 시절부터 픽션, 즉 스토리는 나를 사로잡았다. 이야기를 꾸며내며 혼자 놀기를 좋아했던 아이에게서 지금의 내가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나는 스토리에서, 이야기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야기의 멀리서, 이야기가 없는 곳에서, 이야기가 아닌 것에서, 이야기의 목소리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야기가 사람의 이름이라면, 이야기의 목소리는 그 사람이 했던 말이다. 나는 사람의 이름을 굳이 기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이 했던 매혹적인 말은 오래오래 간직한다.”
이틀 전, 나는 여전히 여행 중이었다. 취리히를 떠나 프랑스로 가서 그뤼네발트의 제단화를 보기 위해 콜마르에 들렀고, 연극제가 열리는 퐁따무송을 거쳐 독일로 들어왔다. 석양이 내리는 독일 튀링엔의 드넓은 들판을 보기 위해 고속도로가 아닌 시골길을 하루 종일 달리는 중이었다. 수확이 끝난 밀밭 가득 앉아있던 까마귀 떼가 어떤 신호인 듯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것은 하나의 순간이었다. 차 안에 틀어놓은 오디오극에서 말이 들려왔다.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안에 있으면서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살인하는 것은?”
뷔흐너의 희곡 <당통의 죽음>에 나오는 대사였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내 입에서 이렇게 변형되어 흘러나왔다.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안에 있으면서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살인하며 또한 글을 쓰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나는 ‘쓰는 자’라기보다는 점점 더 ‘글의 매개자’에 가까워진다고 느낀다. 미래에 어떤 소망이 있다면 오직 그 역할을 조금이라도 더 잘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어떤 소망이 있다면, 이름이 아니라, 말이 되고 싶다. 지금 내게서 흘러나오는 말은 충분히 멀지 못하고 충분히 없지 못하여,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부족한 목소리에게 단 한명의 독자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과분하고 소중한 영광이라는 것도, 나는 잘 안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단 한 명의 당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 마음은, 당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